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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풍에 얽힌 얘기들

마귀할멈 이야기가 있지, 마귀할미가 굴에서 살았는데 밥을 하던 솥과 빨래를 하던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어. 굴 속에 들어가 보면 이건 솥이구 이건 밥상이구 이런 흔적이 있었는데 이젠 다 없어졌지, 그 굴이 임곡으로 통했다고 하지만 정말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어. 어려서 가보니 굴속에 짐승의 뼈가 있었지. 그 굴이 이젠 다 메워졌어.

그리고 예전에 이 마을에 통물방아가 있었는데 물이 한참 모였다가 툭 떨어지고 또 모였다가 툭 떨어지고 했거든. 밤새도록 방아를 찧는데 너무 방아가 더디니 어떤 처녀가 방아를 찧으며 졸다가 그만 치어 죽었대. 그리고 물방아간 앞에 자리를 만드는 왕골을 심었는데 호랑이가 거기에 자주 나타나 작폐가 심하자 거기다 호랑이 덫을 놓아 호랑이를 잡았대.

또 육발 달린 호랑이가 있어 사람을 많이 해쳤대. 눈이 오게 되면 그 놈의 육발 호랑이가 굴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제가 나온 흔적을 없애고 꼬리로 제 발자국을 지운대. 또 어떤 때는 짚신을 거꾸로 신고 나오니까 사람들은 누가 굴속으로 들어간 줄로 속았어.

요놈이 발가락이 여섯 개가 달렸는데 사람을 많이 해치니까 이놈을 결국 사람들이 잡았지. 임곡 사람이 잡았는데 이 사람이 삼 년밖에 못 살았대.

옥계 청남리에 사는 사람이 봄에 소로 논을 가는데 까마귀가 상투위에 앉더래, 그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지금으로 보면 어느집 사랑방에 모두 모여 자는데 그 사람이 맨 앞쪽에 잤는데도 호랑이가 그 사람만 물어갔대. 앞산 쪽으로 물고 가니까 동네 청년들이 솔쾡이 불을 켜가지고 길을 밝히며 창을 들고 가보니 그 사람을 처치했더래.

또 북동에 학교가 있는데 거길 성매골이라 하거던. 5월 어느 날밤에 부인들이 모여 솔쾡이 불을 들고 혼자 나가더래 다른 사람들이 보니 호랑이가 그 여자의 뒤를 따라간단 말이야. 날이 새자 사람들이 가보니 호랑이가 그 여자의 머리만 바위에 올려 놓고 몸둥이는 다 먹어버렸더래.

옛날에 아이들이 많이 죽으니까 죽은 아이를 묻으면 여우란 놈이 와서 그걸 파먹지. 고쟁이(뒤웅박)속에 먹을 걸 넣어놓고 구멍을 뚫어 놓으면 그걸 먹으려고 여우의 머리가 그 속으로 쑥 들어간단 말이야.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머리가 빠져 나오지 모하거던. 눈앞이 안 보이니까 여우가 그만 마을로 내려온대. 이른 본 청년들이 여우가 둔갑했다고 하며 때려 잡는다는 것이 고만 고쟁이를 부셔 버리면 여우가 도망가 버리지.

옛날 강감찬 장군의 아버지가 여자 백 명을 건드리려 했는데 99명까지만 건드렸을 때 이것을 안 여우가 여자로 둔갑해가지고 어찌해서 낳은 게 강감찬이라는 말도 있지.

  옥계 장터에서 있었던 일이야. 사람들이 기분이 좋으면 장구채로 장구를 치는데 어떤 사람이 장구채를 옹구에다 대고 쳤단 말이야. 거기다 치면 소리가 잘 나니까 거기다 쳤대. 그래 장구를 치는데 어떤 초립동이가 한지 한 장을 사가지고 오더니 손톱으로 그걸 쭉 짼단 말이야. 장구를 치던 사람이 그걸 보더니 그만 기가 죽어 도망을 쳤대. 요 위에 틀집이 있는데 그 틀집까지 도망쳐와 숨었지만 그 초립동이가 쫓아와 밖에서 대고챙이로 꾹 찌르니 그 사람이 그 꼬챙이에 찔려 죽어 버렸어. 자기가 기운이 제일 세다고 뽐내다 초립동이한테 당한 거지.

1. 조사일자: 1995. 4. 28
2. 제 보 자: 신만선(67세. 남. 옥계면 낙풍2리)
3. <한국 강릉지역의 설화> 두창구 저. 국학자료원.1999
대공산성과 칼

여게 쭉 올라가면 대공산성이 있거던. 대공산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대궁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그 산성의 유래는 잘 모르겠어. 큰대(大)자, 구멍 공(孔)자로 모는 사람도 있고 활궁(弓)자로 보는 사람도 있지. 거기에 가보면 쇳물을 녹인 대장간 자리가 있고 우물 자리도 있고 동문, 서문이 있던 돌쩌구의 흔적도 있어.

이 성을 쌓은 시기는 신라때인지 고려때인지 분명치 않은데 “마의태자가 성을 쌓고 임시로 머물렀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이런 성을 쌓고 임시로 머물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단 말야.

강릉이 바닷가에 있으니까 이곳으로 왜구가 자주 침범했단 말이야. 그러니 이를 막기 위해 금산에 비상성이 있어. 거기에 비상성을 쌓아놓고 여기를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적의 침략이 있으면 거기서 일단 방어를 하고 여기엔 비상 식량을 비축해 놓는다든지 해서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것 같단 말이야.

언젠가 어떤 사람이 성 근처에서 장칼을 주은 일이 있는데 꿈에 선몽하기를 “그걸 도로 갖다 놓아라.” 하기에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고 해.

그리고 만기라는 사람도 이 근처 생명골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갔다가 녹슨 장도칼을 주어 가지고 왔더니 꿈에 장수가 나타나더니 “이 놈, 당장 그 자리에 갖다 놓지 못하겠는냐?” 하고 호통을 쳐서 다시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고 하는 말이 있어.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그곳에 자주 나물을 캐러 갔는데 한번은 어느 아주머니가 칼을 주워가지고 왔더니 갑자기 식구가 앓아서 칼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니 나았다는 말도 있어요.

대공산성 밑에 장이 섰던 장터거리가 있고 마장은 옛날에 말을 맨 자리래. 성 뒤로는 깃대 바위가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할머니가 애를 업고 있는 것 같이 생긴 할미바위와 갓처럼 된 갓바위가 있어.

 

1. 조사일자 : 1995. 10. 27.
2. 제 보 자 : 정종순(55세. 여, 성산면 보광2리)
3. <한국 강릉지역의 설화> 두창구 저. 국학자료원.1999
용미암의 용

강릉시 노암동과 유산동 사이에는 속칭 독갑재라는 산마루가 있는데 독갑재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편편한 들판이 있다. 들판은 모두 논인데 논 옆으로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용미암이다.

  옛날 용씨 성을 가진 용부사가 강릉부사로 새로 부임해 왔는데 용부사가 부임해오자 가뭄이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그러자 새 부사가 덕이 없고 액운마저 지니고 왔다고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니 용부사는 마음이 실로 괴로웠다

  하루는 용부사가 동헌(東軒) 마루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며 수심에 잠겨 있는데 남쪽 하늘에 먹구름이 크게 일며 당장에 큰 비가 내릴것만 같아 가슴을 설레었다. 그런데 별안간 독갑재에서 서기가 일더니 구름이 금새 사라졌는데 이와 같은 일이 연 사흘동안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를 괴상하게 여긴 용부사는 통인을 데리고 서기가 일던 독갑재로 갔다.

  독갑재 아래 벌판을 이르니 논 가운데 큰 바위가 있고 바위 틈 사이에 묘가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용부사가 그 묘의 내력을 물으니 한 백성의 대답이 이러했다.

  그 바위는 농부들이 들에서 일을 하다가 앉아 쉬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난 봄에 마을 사람들이 모를 심다가 점심때가 되자 이 바위위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지나던 걸인이 왔기에 밥을 나누어 주고 자기들은 각기 들판으로 일을 하러 갔다가 저녁무렵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 걸인이 수건으로 목이 졸려 죽어 있었다. 당황한 농부들은 묻을 곳도 마땅치 않고 해서 바위 한복판 깊숙이 파인곳에 시체를 덮고 남은 모춤으로 대강 묘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부사는 사람들에게 바위틈의 묘를 파니 목은 사람이고 아래는 용모양을 한 괴물이 나오기에 산 위에 옮겨 잘 묻어 주었더니 그 후 부터는 가뭄이 드는 일이 없이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1. 조사일자: 1988. 6. 7
2. 제 보 자 : 박정자(65세, 여, 내곡동)
3. <한국 강릉지역의 설화> 두창구 저. 국학자료원.1999

짝바위 전설

짝바위는 강릉시 노암동에 있는 독갑재를 넘으면 문정암이 자리잡은 마을에 있다. 그런데 이 바위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바위 두 개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위는 오누이간의 애절한 사연을 지니고 있어 오누이 바위라고도 하고 먼 곳에서 바라보면 코끼리 모양으로도 보이고, 버선과 비슷하기도 해서 버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오래 전의 일이라 한다.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의 부인이 아들을 낳은 뒤 죽었다. 그러자 새로 부인을 얻었는데 그 부인에게는 이미 딸린 딸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과 데리고 들어온 딸은 서로 각별히 친했다. 점점 자라면서 연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다가 어느 날 넘어서는 안 될 일을 범하고야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딸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배가 점점 불러오자 누이는 부끄러워 고민만 하다가 뒷산에 올라가 자살을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빠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뒤따라 그 옆에서 죽어버렸다.

  이 두 오뉘는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 그런데 이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엎드려 간절히 사죄하는 모양을 하고 있기에 이 바위를 짝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짝바위에 대해서는 이와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곳에 살던 어느 부부가 아들과 딸을 낳고 죽자 집안이 어려워 한 때 어린 오뉘가 뿔뿔이 헤어졌다고 한다. 각각 다른 곳에서 성장한 오뉘는 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서로 남매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오뉘간임을 알려주었지만 이미 깊이 사랑에 빠져 쉽게 헤어나지 못하자 하느님이 이를 괘심하게 여겨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생토록 접근치 못하도록 벌을 내려 바위가 되게 하였다고도 한다.

 



1. 조사일자 : 1991. 5. 4.
2. 제 보 자 : 박우순(72세, 여, 노암동)
3. <한국 강릉지역의 설화> 두창구 저. 국학자료원.1999

화재를 예방하는 불금바위

요 앞에 불금바위가 있는데 그게 불을 금하는 바위라는 뜻이죠. 그러니 화금암이라고 불 화(火)자, 금(禁)자, 바위 암(岩)자를 씁니다. 여기에 가끔 큰 불이 나곤 하니까 화재가 나지 않게 해달라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해요.

이 바위는 원래 아주 큰 바위였는데 축항을 할 때 인부들이 이 바위를 깨려고 폭파를 하자 갑자기 멀쩡하던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며 비가 내리고 파도가 크게 일어났대요. 그리고 휙 하는 소리가 나며 무슨 짐승이 바위 속에서 나오더니 저쪽에 있는 십리 바위로 날아가더래요.

불금바위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 바위가 화기를 누르고 있기에 이 마을에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어요.

우리 마을에서 강릉에 나가 학문을 배워 뒤에 크게 성공하신 분이 있어요,
그 분이 어린 시절에 여기서 살면서 매일 강릉으로 학문을 배우러 다녔는데 강릉으로 나갈 때나 강릉에서 돌아올 때는 그 바위에 꼭 절을 올렸대요. 그런데 이 바위를 도로를 만드는 재료로 쓰려고 일본 사람들이 깨버렸거던요.

불금바위를 발파할 때 일어난 일이지요. 그 바위를 발파하던 책임자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는데 강릉에 있는 병원으로 가다가 도중에 피를 토하며 죽었어요. 그리고 파도가 잔잔해진 뒤에 귀가 있는 큰 짐승(지킴이)이 죽어서 물위에 떠다니던 것을 우리도 분명히 보았어요.


1. 조사일자 : 1994. 6. 23
2. 제 보 자 : 홍순남(61세, 남, 사천면 진리)
3. <한국 강릉지역의 설화> 두창구 저. 국학자료원.1999

진이 서낭당 유래

주문진에 진이라는 아릿다운 처녀가 살고 있었대.

주문진 동쪽에 바다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바닷가에 난 해초를 뜯어 먹고 사는 사람이 많았거던.
어느 화창한 봄날 물가 진(津)자, 진이라는 처녀가 마을 처녀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해초를 뜯고 있는데
마침 현감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진이의 모습을 보자 그만 넋을 잃었대.

관아에 돌아온 현감은 관원을 시켜 진이를 데려와 성과 이름을 물었지만 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더래. 그러니 현감은 더욱 마음이 타서 그날 밤 당장 수청을 들라고 졸랐지만 진이는 한사코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대.

진이의 아버지는 어부였는데 자기 딸이 현감의 수청을 거절했다는 말을 듣고 민망해서 딸한테 "네가 현감의 말을 거역하면 미움을 받아 우리 집안이 망하게 되니 제발 현감의 말을 따르거라." 하고 달래기도 하고 강요도 하여 보았지만 자기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면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밖에서 부모가 아무리 문을 열라 해도 열지 않더래.

이러기를 4, 5일간 계속하다가 화가 난 아버지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보니 딸이 이미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죽어있고 땅 옆에는 웬 아이가 죽어 있더래. 이게 웬 아이냐 하면 진이가 부모 몰래 장래를 약속한 남자의 아이라. 그래 절개를 지키려니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게지.

그 뒤로 주문진에서 고기를 잡으러 나가기만 하면 풍랑이 일어나 고기를 잡을 수 없고 배가 뒤집혀 어부가 죽는가 하면 마을에 괴상한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당했대.
사람들은 이런 재난이 억울하게 죽은 진이의 원귀 때문인 것을 알고 서낭당을 만들고 진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리니 비로소 이런 재난이 없어졌고 고기도 풍어가 되었다 해.

 

1. 조사일자 : 1999.4.24.
2. 제보자 : 설증범 (71세, 남, 주문진읍 주문진리 용소골)
보현사의 유래

보현사가 창건된 것은 지금부터 1,300년 전쯤 일이야. 보살은 문수보살하고 보현보살이 있어.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고, 보현보살은 행(行)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인데 그 두 분의 보살을 이제 천축국, 지금은 인도이지만 거기에서 배를 타고 남항진이라는 곳, 지금 그 강릉 공항이 있는 쪽 남항진, 거게 배를 대고 그 옆에다가 한송사라고 쪼그만 절을 짓고 모셨는데, 거기에 두 분 보살이 같은 절에서 이렇게 거처하니까 별로 의미가 없거던.

“한 절에 굳이 두 보살을 모실 필요가 있느냐?”
스님들이 이렇게 상의한 끝에
“이절엔 보살님 한 분만 모시고 다른 보살님은 다른 절에 모시자.”하고 합의를 봤대.
그래 이제 두 분의 부처 중에서 보현보살을 옮기기로 하고 옮길 장소를 정하는데 “이 한송사에서 활을 쏴 가지고 활이 떨어지는 곳에다가 절을 짓고 모시도록 하자.” 이렇게 결정을 봤대.
그런 뒤에 대관령을 향해서 활을 쐈더니 지금의 보현사 자리에 떨어졌다고 그래.

이렇게 되어 화살이 떨어진 곳에 절을 짓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보현사라 부르지 않고 지장선원이라고 했대.

절에는 보살이 있는데 보살마다 각각 담당하는 역할이 다르대. 그런데, 지장보살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모조리 제도하고 난 후에 자기가 성불하겠다, 부처님이 되겠다. 이렇게 뜻을 세우신 분이야.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지장선원이라고 했는데, 조선조시대까지 400여년 동안 지장선원이라고 부르다가 후대에 와서 보현도량이라 해서 보현사라 이렇게 이름을 지었어.

 



1. 조사일자 : 1996. 5. 12.
2. 제보자 : 도완스님 (출가한지 22년, 남, 성산면 보광리 보현사 주지)
송정과 왜군

송정이란 이름의 유래는 고려말에 동원 최씨의 시조 할아버지가 처음 강릉에 올 적에 소나무 여덟 그루를 가지고 와서 심었거던. 그 소나무가 점점 크니 팔송정(八松亭)이라 했는데 뒤에 송정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그리고 송정에 대해서 달리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송정, 해운정, 한송정 같이 8개의 정자를 의미한다는 말도 있고 그리고 또 구산, 성산, 왕산, 학산, 병산, 모산, 회산, 운산, 두산 등 10산이 있거던. 그런데 풍수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강릉에 팔송정과 10산이 있어서 강릉 사람들이 잘 산다고 하지.

그리고 바다에서 「치」자가 들어가는 고기가 많이 잡히니까 그걸 먹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아간대요.

송정에는 굵다란 소나무가 많이 있어. 이 소나무에 얽힌 전설이 있지.
임진왜란 때 가장 해를 입지 않은 곳이 송정이라고. 왜서 해를 안 입었느냐 하면 왜군 장수인 풍신수길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생이 점을 굉장히 좋아했대. 풍신수길이가 조선으로 전쟁하러 나올 적에 그 동생이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 “조선에 가거들랑 소나무 송(松)자가 들어 있는 곳엔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라” 이런 엄명을 내렸대요.

조선에 쳐들어온 왜병들이 대관령 말랑이에서 강릉을 내려다 보니까 아주 뿔치레한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매우 많거던. 군사들이 날날하게 서 있으니 왜군 장수가 부하들을 보고 “저게 뿔치레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부하들이 “저건 군복을 입은 조선 군댑니다.” 하니 질겁해서 모두 도망을 쳤대.
그런데 왜놈들은 그걸 군대로 잘못 본 거지.

이쪽 지방에서 그때 조니 옥수수니 수수니 이런 걸 많이 심었는데 이걸 말릴 데가 없으니까 수수를 베어서 묶어가지고 송정의 소나무에 걸어 두었대.
그런데 입새와 대가 마르니까 그게 뿔치레해졌거던.
이걸 본 왜놈들이 그만 그게 군대인 줄 알고 겁인 나서 도망을 친거야.
그래 송정엔 왜놈들이 침범을 못했기 때문에 피해를 제일 입지 않았다고 해요.


1. 조사일자. : 1995. 11. 11.
2. 제 보 자. : 김관기(45세, 남, 송정동)

소돌의 지형과 서낭당신

우리 동네는 지형의 형상이 소의 형국을 갖췄다 해서 소돌이라고 하지. 한자로는 우암(牛岩)이라 하지만 보통 소돌이라고 부른단 말이야.

다리를 건너가면 큰 길이 마을의 가운데로 나 있는데 그 길의 이쪽 산은 황소같고 저 쪽 산은 암소같이 생겼어. 이 쪽 산이 저쪽산 보다 크고 또 머리 부분에는 돌이 많았어.

그리고 예전에는 사람키의 두 배쯤 되는 우뚝한 돌 두 개가 촛대바위처럼 있었는데 마치 소의 귀 같았어. 해변을 향한 능선이 소의 머리와 몸통에 해당되고 능선 서쪽의 우물은 소의 젖에 해당되지.

서낭 건너편에 있는 뾰족뾰족한 돌을 소뿔이라 했고, 바다쪽에 옛날에 어항으로 쓰였던 물이 고인 곳을 소 구유(소 죽그릇)라고 했는데 이곳으로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가지고 들어오니까 소가 항상 배가 불렀다고 하거던. 또 맹물탕이라고, 바위 틈 아래로 물이 깊숙히 고인 곳을 소가 머는 물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단 말이야. 그리고 이 산기슭을 돌아가면 우푹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소의 앞다리이고 고개를 넘으면 소똥골, 우분곡(牛糞谷)이라고 하니 이 지역을 소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거가 있단 말이야.

그리고 우리 마을에는 토지지신, 서낭지신, 여역지신의 3위를 모시고 서낭제를 지내지만 서낭당은 없어. 바위 꼭대기 거기에다 서낭당을 지어 놓으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곤했대. 갑자기 폭풍우가 쳐서 부서져버린데.

이런 일이 수 차례나 반복되니 서낭당을 짓는 일은 포기했기에 서낭당이 없고 왜정때 쯤 약간 담을 쌓아 놓은게 있을 뿐이야. 그 당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해당화만 우거져 있는데 그 해당화를 섬기거던. 이렇게 해당화를 섬기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

옛날에 이 마을에 예쁜 처녀가 있었는데 이웃 마을에 사는 총각과 눈이 맞아 부모 몰래 만나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었대. 그래 눈총을 받게 되자 처녀 총각이 거기 동대라는 바위에 가서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들이 빠져죽자 이 동네가 망하기 시작했대. 그런 일이 있은 뒤 고기도 안 잡히고 농사도 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하나 둘씩 떠나갔대.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의논을 했대. 총각은 다른 마을 사람이지만 처녀는 이 마을 사람이니까 처녀의 혼백을 위로하는 제를 올리자고 의견을 모은 뒤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 어디서 오는지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쭉 지켜보고 있다가 제사가 끝나면 어디론지 가버리더래.

이런 일이 제사 때마다 일어나자 사람들이 생각해보니 그 청년 이름이 봉(鳳)자가 들어 있었고 처녀의 이름엔 해(海)자가 들어 있었더래.

해마다 제사 때면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돌 바위에 이상한 나무가 생기더라는 게야. 이 나무에 가시가 돋아나고 잎사귀가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처음엔 파랗다가 나중에는 빨갛게 되어 바람이 불면 바다쪽으로 날아가 버리더래.

그런 뒤부터 동네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대.
그야말로 육해풍년이야. 고기도 잘 잡히고 농사도 잘 되니 다른 곳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마을이 번성해졌대.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뒤로 봉황새가 오지 않는 게야.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또 모여서 봉황새가 오지 않으니 제사 때 봉황새 대신 닭을 쓰기로 하고 장닭을 썼대.

마을 옆 바닷속에 칠성바위가 있는데 북두칠성 같이 생겼어. 언젠가 여기서 처녀, 총각이 칠성님께 소원을 빌었더니 용왕님이 바위로 만들어 준거래.


1. 조사일자 : 1998. 5. 16
2. 제보자 : 이춘섭(83세, 남, 주문진읍 소돌)

율곡 살린 나도밤나무

율곡 선생의 아버지는 한양에서 벼슬을 살고 어머니는 친정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그러니까 율곡선생의 외할머니가 잔치집에 가고 집에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하고 시아버지하고만 있었대.

시아버지가 낮에 툇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하늘에서 해가 자기 집 마당으로 뚝 떨어지더래. 그래 꿈을 깬 뒤 생각해보니 건 상서로운 태몽이거던. 자기 부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부인이 잔치집에 가고 없으니 부인에게 아이를 잉태시킬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마침 사위가 왔단 말이야. 그러니 사위하고 딸이 관계를 할까봐 집안에 돌아다니며 기침을 한다, 마당을 쓴다 하면서 훼방을 놓더래. 그런데 누가 밖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십여년 전에 헤어진 절친한 친구가 찾아 왔거던. 그러니 얼마나 반가운가. 그래서 시아버지가 “너희들은 저 방에 들어가서 잠깐 있거라” 하고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사위와 딸이 생각이 나서 그 방에 가보니 그 사이에 그만 일을 저질렀더래. 그래서 낳은 아이가 이율곡 선생이야.

이율곡 선생이 점점 자라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일인데 어느날 도사가 지나가다가 율곡 선생의 관상을 보더니 “이 아이는 참 훌륭한 인물이 될 터인데 범한테 물려갈 액운이 끼어있으니 아깝구나.” 이런단 말이야. 이 말을 들은 부모가 깜짝 놀라 그 액운을 피할 방법을 물으니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참 어려운 일이라서 곤란합니다.” 하고 난처해 하더라는 게야. 그렇지만 비록 어려운 방법이라도 있다고 하니까 “무슨 방법인지 제발 알려주십시오.” 하며 매달렸단 말이야. “올 해 안에 밤나무를 천 그루를 심되 이 아이가 자기 힘으로 심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아홉 살 밖에 안된 아이가 스스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한다이거야.

그러니 이 아이가 날마다 산에 가서 부지런히 밤나무를 심었대. 그래 그해 섣달 그믐까지 천 그루를 심는다는 것이 실은 한 그루가 모자란 999 그루였거던. 율곡이 천 그루를 다 심은 줄 알고 돌아오는데 범이 앞에 나타나더니 “밤 나무 천 그루를 심었더라면 너는 살았을 텐데 한 그루가 모자라니 너를 잡아 먹어야겠다.” 이러면서 달려들자 밤나무 비슷하게 생긴 나무가 소리치기를 “나도 밤나무다.” 이러니 범이 천 그루를 채운 줄 알고 율곡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갔대.

그래 그 나무를 나도밤나무라 부르게 된 게야. 이래서 율곡은 밤 율(栗)자, 골 곡(谷)자를 쓴단 말이야.

선교장 앞에 아주 오래된 나무가 지금도 있어. 그게 나도밤나무야.

 

1. 조사일자 : 1994. 4. 26
2. 제 보 자 : 조영대(85세, 남, 사천면 사기막리)